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망이·망소이의 난 (문단 편집) == 배경 == 망이와 망소이가 거주하던 '소(所)'는 [[고려]]의 일반 행정 구역인 주·군·현과 다른 특수 행정 구역으로, 농경 대신 특산물 제작과 공납에 특화되어 있었다. 소에서는 지역 특성에 따라 금, 은, 철, 명주, 종이, 기와, 숯, 도자기, 차 등을 생산했다. 소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다. 망이·망소이의 이름에 망할 망(亡)이 들어간 것을 보면 그들의 처우가 짐작된다. 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난의 주동자는 소 출신이었다. 다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중심지를 함락시키려면 소수의 소 주민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며, 여기에는 공주목의 일반 군현민들도 가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지배층의 수탈과 토지 겸병 등으로 농지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무신란으로 인해 기존의 사회 질서가 이완된 점도 한몫했다. 이것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 외관의 문무교차제가 실시된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무신들은 문신 대신 외관직을 독점하려고 하였으나, 벼슬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문신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문무반의 밥 그릇 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지방 행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백성에 대한 수탈도 날로 더해 갔으며, 이런 까닭으로 고려 중기 유망 농민이 난을 일으키는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추가로 당시 서북면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전투에 필요한 물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따라서 명학소의 공납 부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난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